•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대입수능시험 "문제"는 바뀔 수 없는가?

대입수학능력시험 때면 해마다 문제 출제 논란이 거듭되어 왔다. 지난 해에는 출제 오류로 인해 집단 소송까지 이어지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피해를 보는 안타까운 현실이 한동안 지면을 도배했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거의 모든 것이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대학입시에서 가장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 수능시험의 문항 하나하나에 학생들은 극도로 예민할 수 밖에 없다. 대입시험을 본 지 20년도 더 지난 마당에 다시금 시험지를 들여다 보았다.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A형) 문제. 우선 100% 객관식 문제이다. 전체 45문항 중 질문 유형은 다음과 같다. 26 문항: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4 문항: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5 문항: "~일치하지 않는 것은?",  "~에 가까운 것은?", 혹은 "아닌 것은?" 어쩌면 20년 전과 이렇게 똑같을까… 시험문제의 유형, 성격, 형태 모든 것이 20여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4지선다형이 5지선다형으로 바뀐 것뿐, 객관식 정답 맞추기는 여전했다. B형 시험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나의 생각인지보다 5개의 보기 중 정답과 정답이 아닌 것의 미묘한 차이를 얼마나 잘 구분해 내는지를 평가하고 있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정답과 정답이 아닌 보기가 더 유사하게 출제되고, 거의 대동소이한 정답 같은 것들 중에서 미세한 차이점을 구분해 내는 것이 우수한 능력으로 평가 받게 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서도 현재의 수능이 학생의 학업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이중 삼중으로 비틀어 출제하는 문제 형태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의 모든 문제를 짚어 올라가다 보면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게 대입시험이라는데, 왜 수많은 전문가들이 교육문제를 해결한다고 외치고 있음에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형태의 대입 시험문제를 풀어야만 할까? 객관식 정답 맞추기 형태의 시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으레 따라오는 반론이 평가의 객관성, 신뢰성, 공정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식으로 출제할 경우 객관적인 표준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표준화 시험은 문제출제, 시험 치르는 방식, 채점하는 방식, 성적 산출 등이 일관성이 있게 설계되어서 매 시험마다 점수만 보고도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규모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다. 우리나라 수능시험, 미국의 수능시험인 SAT, 토익, 토플, 텝스 등이 모두 표준화된 시험이다. 그러나 객관성과 신뢰성이 검증된 표준화 시험이면서도 객관식 정답 맞추기형 시험이 아닌 사례도 있다. IGCSE(International 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 국제중등교육이수자격시험)는 중등교육(중고등학교)을 마치고 보는 평가로, 전세계에서 널리 치러지고 있는 국제 표준화 시험이다. IGCSE 시험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1988년에 개발된 것으로, 현재 전세계 120개국에서의 국제학교나 사립학교들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 시험 결과는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대학들에서 인정하고 있으며, 상위 심화 과정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과정이나 A-Level 과정을 이수하는 경우도 많지만, IGCSE 만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도 있다.   IGCSE 시험은 국제표준시험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70 과목 이상의 교과 시험이 개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한글로 되어 있는 한국어 시험문제를 우리나라의 대입 수능 국어 시험문제와 비교해 보자. 미국 수능인 SAT에서의 한국어 시험이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시험인 것과는 달리, IGCSE 한국어 시험은 모국어로서의 한국어시험이므로 우리나라의 수능 국어와 비교할 만하다. 지면관계상 지문은 다 옮기지 못하고 시험문항의 일부만 그대로 옮긴다. ----------------- IGCSE 국어 시험 ▶시험 1: 읽기 (2시간) [지문 1]: 박완서의 단편소설 <그 여자의 집>의 일부분. 일제 말기 고향 마을에 살던 곱단이와 만득이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회상하는데, 소설의 결말에서는 정신대 할머니를 돕는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장만득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답을 쓸 때에는 가능한 지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쓰지 말고 자신의 문장으로 쓰시오) 12문항 1) 만득이가 한사코 혼사치르기를 거부한 까닭은 무엇인지 설명하십시오.(1점) 2) 혼사 날 '만득이가 엉엉' 울었던 속마음의 까닭은 무엇인지 쓰십시오.(2점) 3) 장만득 씨가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이라고 했을 때 '당안 자의 한'은 무엇이고 '면한 자의 분노'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하고, 그 둘을 보태고 싶은 장만득 씨의 마음이란 어떤 뜻인지 작품 전체와 결말 부분을 읽고 자신의 문장으로 설명하십시오.(4점) …… [지문 2]: 박은봉의 <한 권으로 보는 한국사 100 장면> 중 일부분. 조선 여성을 강제로 연행하여 종군위안부로 이용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내용. [지문 1]에 나오는 만득이와 곱단이의 삶이 [지문 2]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두 주인공의 일생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각각 요약 정리하십시오. (답안의 내용에 따라 15점까지 주어지며, 답안의 언어구사력에 따라 추가로 10점이 주어집니다. 문제와 구성에 5점, 언어의 정확성에 5점) ▶시험 2: 쓰기 (2시간) 다음의 섹션 1(토론과 주장)에서 하나, 섹션 2(묘사와 서술)에서 하나의 주제를 골라 각각 350-500 단어로 쓰십시오. 섹션 1(토론과 주장) 주제 (25점) • 인간의 삶이 영원하다면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어떤 입장인지 근거를 들어 논하십시오. • 학교에 체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에 대해 논하십시오. •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은 비싼 가격에 팔립니다. 예술품의 상품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논하십시오. • '개인 행동만으로는 지구온난화의 진행을 변화시키지 못한다.'에 대해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논하십시오. 섹션 2(묘사와 서술) 주제 (25점) •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 세 가지를 골라 묘사하십시오. • '선과 악' 하면 떠오르는 인물 둘을(유명하거나 유명하지 않거나) 골라 각각에 대해 묘사하십시오. •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만드십시오. •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오늘은 처음 이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다. 벌써 세 번째 학교를 바꿨다.'로 시작하여 이야기를 완성하십시오. ---------------- 처음부터 끝까지 객관식 문항은 단 한 개도 없다. 적절한 것과 적절하지 않은 것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종류의 문제도 아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답을 쓸 때에는 가능한 지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쓰지 말고 자신의 문장으로 쓰시오"라는 지침이다. 권장사항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상 본문의 단어를 그대로 쓰면 감점 대상이 되기 때문에(채점 가이드라인에 명시되어 있음),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말로 써야 한다. 서술형 문항에서 본문의 내용과 토씨 하나 달라도 틀렸다고 채점하는 우리 교육 현장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각국에서 학생들이 작성한 답안지는 모두 영국으로 보내져서 채점된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70여개의 전 과목이 이렇듯 서술형이다. 그럼에도 채점 가이드라인이 미리 체계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전세계 120개국의 수많은 학교들이 채택한 이 시험에서 채점의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객관식 문항이 전혀 없어도 IGCSE 평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객관적인 표준화 시험이다. 객관적인 평가여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시험문제 형태가 객관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이다. 학생들은 시험평가 기준에 따라 공부한다. 교사들도 평가 기준에 따라 가르친다. 우리의 대입 수능에서는 하나의 정답을 정해두고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능력만 훈련할 뿐 학생들의 독창적인 생각을 묻는 질문은 없다.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정해진 정답을 구분해 내는 공부만 하게 된다. 그럼 그렇게 죽어라 공부를 해서 궁극적으로 길러지는 능력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IGCSE 시험을 보는 학생들도 열심히 시험 공부를 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매우 중요한 시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모의고사도 보고 예상문제도 풀어보며 거의 1년 내내 시험준비를 시키고, 학생들은 밤잠을 줄여가며 일반적인 한국학생들 못지 않게 치열하게 공부한다. 그런데 종류가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다. 모의고사이든, 기출문제이든, 위에 제시한 그러한 유형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정해진 국정 교과서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EBS 연계 출제처럼 지문이나 문제가 예상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저 끊임없이 다양한 문학작품이나 신문 사설 등 많은 글을 읽고 토론하고 고민해보고 자신의 말로 설득력 있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시험공부를 한다. 교사도 그러한 시험 공부를 위해 가르친다. 시험이 이렇다면 그러한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은 또 어떠하겠는가? 교과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답안을 써야 하는 우리 교실에서의 모습과 달리, 자신의 말로 자신의 생각을 써야 함을 치열하게 단련시킬 것이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궁극적으로 길러지는 능력은 우리 수능을 향해 공부한 학생들의 능력과 같은 종류일 수 없다. 수능시험문제가 이러한 방식이라면 오히려 대학별 수시전형에서의 논술시험이나 면접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현재의 수능은 논술이나 면접과는 다른 능력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중으로 고생을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학생은 시험에서 평가되는 기준에 따라 공부한다. 교사도 대입시험의 평가 기준에 따라 최적화되게 가르치려 노력한다. 그러므로 대입시험이 바뀌면 학생이 공부하는 내용도, 교사가 가르치는 방식도, 다 바뀐다. 시험의 객관성, 공정성 운운하며 바꾸기 어렵다 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혹 채점의 비용 문제를 들고 나온다면 우리의 사교육 비용을 생각해 보라 해야 한다. 해마다 엄청난 국민의 에너지가 엉뚱한 시험공부를 위해 낭비되면서도 수십 년간 교육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 죽은 말을 일으켜 세우려고 당근을 주고 채찍질을 하며 온갖 예산을 쏟아 붓기 보다는 그냥 다른 말로 갈아타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출처: 중앙일보 2015.05.11.] "대입수능시험 "문제"는 바뀔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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