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1970년대만 하더라도 동네마다 약장수가 돌아다녔다. 약장수는 약만 파는 것은 아니었지만 약을 주로 팔았기 때문에 약장수라 불렸다. 당시에는 기생충약을 주로 팔았지만 그 외의 여러 가지 '만병통치약'이라 부르는 것을 팔았었다. 약장수가 왔다고 하면 동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여들었다. 약장수한테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물론 약을 사겠다는 의지를 처음부터 가졌기 때문은 아니다. 우선은 재미가 있었다. "이~ 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약장수는 정말 말을 청산유수로 잘했다. 듣는 이로 하여금 푹 빠져들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 전혀 믿지 않던 동네 사람들도 한참을 듣고 나면 반신반의하게 되고 약장수가 그 자리에서 보여주는 몇 가지 신기한 실험을 보고 나서는 급기야 약장수의 말이 천하의 진실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약을 사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현란한 말솜씨를 지닌 사람에게 '약장수'라고 부르곤 했다. 둘. 뉴스에 심심치 않게 족집게 고액과외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일반인들이 엄두도 못 낼 가격으로 족집게 과외가 성행이란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정말 족집게 과외교사가 그렇게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문의를 많이 듣는다. 얼마나 족집게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더 잘 가르치는 선생이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족집게 선생은 시험 성적을 올리는데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위의 두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약장수와 족집게 교사에 대해 강의평가를 하면 매우 높게 나올 것이라는 점이다. 약장수의 현란한 말에 넘어간 동네 사람들이나 족집게 교사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나, 그 자리에서 강의평가 설문지에 체크하라고 하면 대부분 최고 점수를 줄 것이다. 순간 집중도와 몰입도를 극대화하여 주목하게 하였으니 우수한 강의평가 점수를 받을 만하다. 대학에서의 강의평가도 이렇다. 교수가 청산유수로 재미있게 말을 해서 학생들의 몰입도를 극대화시킨 경우 학생들은 높은 강의평가 점수로 보답한다. 그리고 그 교수는 명예롭게 우수교육자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학교에서는 이를 타 교수들의 모범이 되도록 홍보한다. 약장수나 족집게 교사는 더 우수한 강의평가 점수를 받을지라도 우수교육자상의 명예까지 얻지는 못하니 '잘 가르치는' 업종에서 명함도 못 내밀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우수하다고 평가된 수업들에서 결정적으로 평가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무엇을 가르쳤는가'와 '어떤 능력이 길러졌는가'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분명 다 옳은 것이고 가장 중요한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선정되었을 것이라는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믿음, 가르쳐지는 내용을 잘 숙지하는 것이 잘 배우는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 교수가 가르치는 것은 진리일 것이라는, 그래서 내가 다른 의견이 있다 해도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이 더 정답일 것이라는 인식, 이러한 당연함이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인터뷰하면서 대다수로부터 드러난 공통점이었다. 이러한 믿음과 인식 때문에, 우리는 이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주어진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몰입하게 되면, 심지어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와서 잘 숙지하게 되면, "우수한" 수업으로 평가하게 된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고교 평준화 이후 중학교 학생들은 매년 무작위로 고등학교에 배치되어 왔다. 그런데 어느 고등학교는 늘 대입성적이 좋고 어느 고등학교는 늘 좋지 않다. 그래서 명문고교와 그렇지 않은 고교가 있고, 학부모와 학생들은 고등학교 배치 기간이 되면 대입성적이 좋은 소위 '명문고'에 배치되길 가슴 졸이며 바란다. 왜 매년 무작위로 학생들이 배정되어도 늘 성적이 좋은 학교와 늘 성적이 좋지 않은 학교가 있는 걸까? 교사의 질 때문이다. 분명 같은 내용을 더 잘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 그러니 인기 있는 명강사가 있고 집단의 평균을 올려놓는 선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무엇을 가르쳤고 어떤 능력을 길렀느냐' 하는 것이다. 학생도 자신의 어떤 능력이 길러졌는지 보다는 얼마나 선생님의 말씀을 잘 숙지했느냐의 정도로 공부가 잘 되었는지 판단한다. 교사 역시 자신이 학생의 어떤 능력을 기르도록 가르쳤는지를 반성하기 보다는 주어진 내용을 얼마나 능란하게 전달했느냐로 잘 가르쳤는지를 가늠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초/중/고 공교육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대해 교사에게 별로 선택권이 없다. 국가가 정하기 때문이다. 교육과정과 대학입시를 국가가 관장하는 한 교사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학생의 "무슨 능력을 기르는지"는 국가가 정한다. 국가에서 정한 이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문제는 교육과정 개정 때마다 지적되는 해묵은 논쟁이니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그러나 대학은 다르다. 십여 년을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어느 누구도 내게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간섭한 적이 없었다. 강의시간에 무슨 내용을 어떤 방법으로 가르칠지는 전적으로 강의하는 사람의 재량이다. 대학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혼자 가르칠 내용과 방법과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길러지게 될 학생들의 능력까지 모두 결정하는 셈이다. 서울대만 해도 교수와 강사가 약 4천명에 가까운데 그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점검하고 평가하고 개선하도록 지원해 주는 시스템이 없다. 무엇을 가르치든, 어떤 능력이 길러지든, 사회의 인재를 길러내는 중차대한 대학교육에서 이를 점검하고 관리 감독하는 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교육의 질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대두되니 힘들게 도입한 것이 강의평가이다. 그런데 강의평가에서는 정작 가장 중요한 '무엇을 가르치는지, 어떤 능력을 기르고 있는지'를 평가하지 못한다. 이것이 강의평가의 함정이다. 약장수가 엉뚱한 약을 팔아도 강의평가를 높게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대학 수업에서도 엉뚱한 것을 가르쳐도 강의평가를 높게 받을 수 있다. 대학교육에서 추구하는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이 전혀 길러지지 않고 오직 수용적 지식만 전달하였어도 강의평가 점수는 높을 수 있다. 배울 거 하나 없다고 욕먹는 막장 드라마라도 시청률은 높을 수 있는 것처럼. 물론 대학의 모든 강의가 다 엉뚱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매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 훌륭한 내용을 선정해서 훌륭한 방법으로 훌륭한 능력을 기르는 강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강의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교육의 질을 위해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능력이 궁극적으로 길러지는지 돌이켜 보고 점검할 수 있는 시스템적 구조가 있어야 한다. 시청률만으로 우수한 프로그램을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강의평가만으로 교육의 질을 단정할 수 없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교사의 질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시대와 사회의 구조와 제도이기 때문이다.
[출처: 중앙일보 2015.02.27.] "대학 강의평가의 함정: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가 없다?"
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