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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강의실에서의 폭스 박사

1973년에 미국의 심리학자 나프툴린(Donald H. Naftulin)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 배우를 권위 있는 박사인 것처럼 꾸며 전문 학회에서 발표를 하게 했다. 발표에 앞서 청중들에게 그 배우는 해당 학문 분야의 권위자 폭스 박사라고 소개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 배우는 발표 주제 분야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으며 발표 내용은 모두 사전에 엉터리로 제작된 대본이었다. 학회 참석자들은 일반 학생이 아닌 모두 석박사 이상의 학력을 가진 전문가들이었다. 그런데도 실제 발표가 끝난 후 청중들은 강연에 대해서 매우 만족스러워 했고 이구동성으로 정말 많이 배웠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강연자가 권위 있는 위치에 있다고 믿는 경우, 그리고 권위 있게 보이게끔 외양적으로 카리스마 있고 유창하게 강연할 경우, 청중들은 그 강연자가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전문가의 진실일 것이라 믿으며 만족스러워 하고 동조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폭스 박사 효과(Dr. Fox Effect)'라 한다. 폭스 박사 효과는 강의실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권위 있는 교수님이 전달하는 강의 내용에 대해 학생들은 전혀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고 그냥 진실일 것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강의 내용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지, 그것만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와 같은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는다. 교수님의 강의 내용이 가장 진실일 것이라 믿고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에 기술된 여러 조사 결과들 중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바로 "교수님과 자신의 의견이 다를 때, 혹은 교수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 그것을 시험이나 과제에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서울대의 최고 학점자들 46명 중 41명이나 쓰지 않는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그 이유다. 단순히 A+를 받기 위해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학생들은 자신이 교수와 다른 생각이 있다면, 설령 자신의 생각이 더 옳은 것처럼 생각되었더라도, 뭔가가 틀렸을 거라 믿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틀렸다고 지적한 사람이 없었음에도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이 교수와 "다르다"면 "틀리다"로 지레 판단했다. 누가 우리 학생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를 회사의 모토로 삼고 있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봤다면 통탄할 일이다. 교수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다 보면 많은 교수들이 강의실에서 비판적, 창의적 수업을 하려고 해도 학생들이 선호하지 않고 잘 참여하지 않아서 심지어 강의평가 점수가 떨어지기까지 한다는 하소연을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비판적 창의적 수업의 어려움을 말할 때 흔히들 동서양 공부의 문화적 차이를 언급한다. 공부에 대한 동양적 접근이 전통의 재해석과 재창조인 반면, 서양적 접근은 독창성과 새로운 발명/발견의 촉진이기 때문에 동양 사회에서 창의성이 덜 개발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비판적 창의적 학습법은 문화보다 그들이 받는 교육, 교수법, 언어적 표현,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에 의해 더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여러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문화는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한 편리한 핑계일 뿐, 다문화 환경에서도 일관된 패턴을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을 설명하지 못한다. 예일대학교의 뉴(Niu)와 스턴버그(Sternberg)는 중국학생들과 미국학생들의 창의성을 비교한 일련의 연구들에서, 중국학생들이 미국학생들보다 수학/과학 국제학력평가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수하지만 창의성에서는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중국 학교에서 학생들이 "창의적이 되도록 가르치지 않아서"이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인종적 문화보다 학교에서의 영향을 더 결정적인 영향으로 분석한 이유는 미국 내에서 나고 자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아시안보다 미국학생들의 패턴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뉴와 스턴버그에 의하면, 학생의 창의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 된다. 우선은 간단히 학생들에게 창의적으로 하라고 이야기만 해도 학생들은 창의적으로 과제를 수행한다는 점을 저자들은 확인하였다. 그러한 간단한 가르침이 학생들로 하여금 환경의 규범과 제약을 극복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지 조금만 자세히 설명해 줘도 학생들의 창의력은 훨씬 향상되었다. 즉 학생들이 창의적이 되도록 허용해 주면 창의적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존의 교육이 학생이 창의적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수의 강의와 교과서가 전달하는 내용을 최대한 똑같이 기억해 내는 것만을 평가하는 한, 학생들의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은 길러지지 않는다. 사회와 학교는 개인의 순응성보다 자율성과 독창성을 장려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 되는지가 매주 강의안에 설계되어야 한다. 일부 이공계통 교수들은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 수업은 문과나 가능하지 이과는 정답이 정해져 있어서 불가능하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야말로 분석력에 더한 창의력에 의해 발전해 오지 않았던가? 왜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을 미래의 과학도들에게는 길러주지 않는가? 문화 탓을 할 게 아니다. 학생 집단의 역량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학생의 탓이 아니라 교육의 문제이다. 수업에서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다면, 학생이 질문할 수 없도록 수업을 운영하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한다. 학생들이 비판적 창의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수업을 운영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 봐야 한다. 강의실에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늘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절대 진리로 믿어지는 폭스박사이기 때문이다.



[출처: 중앙일보 J Plus. 2015.10.05.] "강의실에서의 폭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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