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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세종에 맞선 최만리는 어리석었던 것인가?

몇 년 전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뿌리깊은 나무"라는 사극이 있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을 다룬 사극인데, 당시 한글 창제에 반대했던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논리가 오늘날의 교육 문제에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준다. 최만리의 상소문에 대한 역사론적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상소문 이외에 실제 세종과 최만리와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최만리가 세종과 나눈 대화가 인상 깊어 소개하고자 한다. 세종의 한글창제에 맞서 상소를 올린 최만리가 세종과 논쟁하다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양반을 없애실 수 있사옵니까? 노비를 없앨 수 있사옵니까? 사농공상의 층위를 없앨 수 있사옵니까?" "없앨 수 없다."라고 세종이 답하자 최만리가, "헌데 글자라는 희망만 백성들에게 내리시오면, 그 희망으로 고신당하는 백성들은 어찌합니까?" 지식은 권력이자 무기이다. 쉬운 글을 창제한다는 것은 백성 전체에게 그러한 권력이자 무기인 지식으로의 접근성을 높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차피 사회 구조라는 것이 다수의 피지배계층과 소수의 지배계층의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다수의 피지배계층에게 소수의 지배계층이 접할 수 있는 교육과 지식이 제공되게 되면, 사회 구조적으로 모든 백성이 지배계층이 되는 것이 불가함에도 불구하고 피지배계층의 백성들이 지배계층으로의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당연히 모두 지배계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백성들은 이에 불만을 갖고 불행해지므로 이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즉,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대다수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모든 이들에게 모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자체가 "좀더 공평해 보이는 그럴 듯 함은 있지만" 동시에 대다수 국민들을 행복하지 않게 살도록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사회구조를 바꿀 수 없는데 지식으로의 접근만 열어 주면 희망고문이지 않느냐는 최만리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논리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정기준의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정기준은 지식이 곧 권력이자 기득권인 세상에서 그 지식의 근간이 되는 문자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위정자의 무책임이라 주장한다. 그 글자로 인해 백성들은 지혜를 갖게 될 것이나, 그 때문에 지배층에게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성은 보살피고 사랑해야 하는 여인과 같은 대상인데, 한 사내가 여인을 사랑하여 집에 바래다주는 것이 아니라 칼을 하나 사서 쥐어주며 니가 지켜라 하는 격이라는 것이다. 즉 지식으로의 문을 열어주었는데도 불행하다면 그것은 백성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위정자도, 백성들도 믿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백성 개개인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오늘날 우리의 교육을 보고 빗대어 말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명문화된 신분계급이라는 것은 없다지만, 전국민이 학교공부라는 통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학교공부를 기준으로 줄을 세운다는 것은 실제 실력이 어떻든 간에 상대적으로 앞선 사람과 뒤쳐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뒤쳐지는 사람들이 졸업 후 결국 사회에서도 뒤쳐지게 되는데, "학교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믿도록 만든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걔는 공부를 잘해서… 그래서 이러한 구조적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게 만든다. 고단한 삶에 지친 장년층에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더 열심히 할 걸." 이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는 한 갤럽조사결과가, 고단한 삶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인식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부르되나 번스타인을 들먹이지 않아도 현대 사회에서 학교가 계급을 저항 없이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희망고문의 치명적인 독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될 때, 포기하고 다른 희망을 찾기 보다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지식계급의 문틈을 조금이라도 엿본 사람들은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3D 업종의 일은 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공부하게 하면 모두가 다 양반이 되고 싶어할 것인데 그 혼란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따져 묻는, 드라마에서의 최만리와 정기준의 우려가 오늘날의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나? 양반들은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3D 업이라 생각되는 일에 종사하지 않았고 그것을 당연한 처신으로 여겼다. 국민 대다수가 대학에 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모두가 다 공부하고 있는 우리 학교교육은,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3D 업종은 더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는데도, 백수를 양산하고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 다 한 곳만을 향해 달리고 싶어하게 만든다.    너무나 위대한 한글창제에 비하여,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최만리는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근시안적인 주장을 편 역사의 죄인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최만리는 세종이 그 능력을 인정하여 당시 국가의 최고 브레인들만 모아 놓은 집현전의 수장으로 오랫동안 신임하였고, 한글창제에 반대하였을 때도 하루 만에 옥에서 풀어주었으며, 스스로 사직을 한 후에도 세종은 3년 동안이나 그를 그리워하며 최만리의 자리를 비워두었었다. 즉 세종이 아끼고 아끼던 조선 최고의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최만리에 대하여 단순히 사대주의와 기득권 수성을 위해 한글창제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최만리가 당시에 실제로 이런 논지로 이야기를 했는지 사극 작가의 논리가 들어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사극에서의 최만리의 논리가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육 정책에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상 미국이 아무리 공교육이 무너졌고 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에서 하위권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작금의 미국의 패권은 바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우수한 교육을 받은 상위 1% 엘리트가 미국이라는 사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극소수에게만 엘리트교육을 시키고 대다수의 국민이 엘리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팔로우어로서 행복하게 사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이 위정자로서 타당한 판단인지, 대다수가 엘리트가 되지 못함을 불행하게 여기더라도 모두에게 너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여 노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하기 어렵다. 어려운 공부를 싫어도 억지로 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 원하는 것만 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어떤 철학에 기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전자는 기회의 제공이 비교적 공평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을 것이고 후자는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독자에게 묻는다. 상위 1%의 교육과 99% 교육을 구분하여 계급을 고착화하지만 99%에게 현실에 만족하고 행복하도록 하는 미국교육의 구조가 옳은 것인가? 99%가 1%가 될 수 없는 구조 속에서도 모두에게 노력하면 1%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어 전국민이 동등하게 전력 질주하는 한국교육을 견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출처: 중앙일보 2015.01.27.] "세종에 맞선 최만리는 어리석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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